산다이바나시 #1. (180417)

푸른고래의 상상하다.

산다이바나시 #1. (180417)

박청경 | 2018. 4. 17. 18:58


  할아버지의 손등은 밭일에 긁혀서인지 손바닥에 비해 매우 거칠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나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자랐다. 그리고 농사일이 바쁘셨던 할아버지는 본인이 아이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양 농사일에 힘쓰셨다. 아마 어린애를 다루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리라. 어머니도 실질적으로 키워주신건 할머니였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어머니가 20대 후반정도 되셨을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법은 알았지만 애를 키우시는 법은 전혀 모르셨던 것이다.

  그래도 하나뿐인 딸의 하나뿐인 손주라고 이것저것 챙겨주시긴 했지만, 당시의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생일선물이라고 주시는 것이 직접 만드신 콩주머니라니. 싫다고 할수는 없었지만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마음을 할아버지가 못 알아 차리실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무뚝뚝한 태도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딸을 데려가 놓고,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 버리고 도망쳐버린 썩을 놈. 그리고 그 썩을 놈의 자식. 항상 할아버지 한테는 담배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나였어도 그랬겠다' 싶어 체념했다. 어린 나이에 맞지않게 조숙했던 건 조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혼자 큰 셈이다.

  어머니가 돈을 보내줘서 양육비는 그다지 부족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현대에서 농사는 그렇게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손의 생채기가 시간이 갈수록 주름이 되어버리는 것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안가 허리디스크 문제로 입원하신 할아버지는 본인 스스로도 더 농사는 못 하실 것 같다고 하셨다. 사과를 깎고 있던 깜짝 놀라 손을 베일 뻔 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괜찮은, 고목(古木)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한가지 간과한 것은 고목도 언젠가는 쓰러진다는 것이었다.

  나무 뿌리같은 본인 손을 살펴 보시고, 살짝 만지시고, 할아버지는 밭을 팔아 병원비에 보태겠다고 하셨다. 아직 자립할 생각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나에게는 갑자기 막막해지는 소리였다. 단순한 허리디스크고, 재활치료를 하고 나면 당연히 농사일을 시작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자 할아버지는 거의 처음으로 내 눈을 보며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폐암 말기였다.


  눈 감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렸다. 영안실은 매우 쌀쌀했다. 검은 옷에 묻어나온 향 냄새는 내 기분을 대변하는 듯 했다. 항상 나무 뿌리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정말 나무뿌리나 다름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완전 흐트러진 꼴로 상주를 맡고있던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은, 혼자 둬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정말, 정말 서럽게 우셨다. 혼자둬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 앞에서 반론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나는 조용히 주머니 속의, 할아버지가 키운 씨앗들로 만들어진 콩주머니를 쥐며 말했다.

  아니야.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거야.

  어머니를 위로하고, 화장실에서 무심코 그 콩주머니를 꺼내보았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를 알 수 있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주제단어 : 혼자, 손등, 씨앗 

시간 :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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