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의 가치는 같지 않다 (스티븐 호킹을 추모하며)

푸른고래의 상상하다.

목숨의 가치는 같지 않다 (스티븐 호킹을 추모하며)

박청경 | 2018. 3. 14. 15:34

스티븐 호킹(1942.1.8~2018.3.14, 향년 76세)


  사람은 죽는다. 그것은 앞으로 깨질지도 모르는 명제이지만,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은 명제이기도 하다.


  오늘 물리학계의 큰 별 하나가 세상을 떴다. 중학교 때부터 문과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는 그가 어떠한 과학적 업적을 세웠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루게릭병에 걸리고서 몸이 굳어버렸을 때에도 정신만큼은 굴종하지 않았던 인간승리의 표본이라는 사실만큼은 모를 수 없었다. 


  어떤 한 사람의, 특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의 죽음은(그 영향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어찌보던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 모습을 많이 볼 수는 없었지만, 볼 때마다 생각이 드는 것 하나가 있다.


  제목에 썼듯, 모든 목숨의 가치는 같지 않다는 것.


  물론 스티븐 호킹이 죽을 바에는 다른 사람이 죽었어야 한다는 식의 인권훼손적인 말을 할 생각은 없다. 해서는 안된다. 나 자신이 인간인 이상은.


  그럼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사람은 1분에 몇명씩이나 죽는다(정확한 통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기억되는 죽음이 있고, 기억되지 못하는 죽음이 있다. '사람'인 이상, 목숨의 최저선은 예수와 연쇄살인범을 비교해도 같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권이기에.


  스티븐 호킹의 죽음이 기억되고 추모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모의 의미는 두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배웅, 다른 하나는 아쉬움이다(사견으로, 물론 더 있을 수도 있다). 


  배웅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아쉬움은 무엇인가. 그를 떠나보낸 것에 대한, 그사람이 살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 그것이 그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고 기억하게 만든다.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떠난 사람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큰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살아있었다면'하는 가정 아래 생겨나는 '가능성'에서 기인한다. 그사람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것을 보여주었을까. 어떤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을까. 어떤 의견을 제시해 주었을까 하는.


  인권의 최저선을 지킨다는 미명아래에, 목숨의 가치는 만인이 다르다. 그리고 미래라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살아있는 목숨에게 그 가치를 제시할 수는 없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리가 무너지거나, 배가 침몰할 수도 있는 것처럼. 그 가능성이 제거된 사람만을, 긴 여행을 떠나고 만 사람만을 우리는 기리며 그제서야 그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미래(=가능성)이 많이 남아있다면 그럴수록, 안타까움과 아쉬움은 커진다.


  목숨의 가치는 만인이 다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목숨의 가치는, 셀 수 없을 것이다.


  편히 쉬십시오, 스티븐 호킹. 먼 나라에서 먼길 떠나시는 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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